장식을 관찰-재현-규정하기 (2022.10)
1
장식은 선적이다. 여기 선을 긋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하나의 선만 그릴 수도 있고, 선을 중첩하여 또 다른 선을 그릴 수도 있다. 그 사람은 글씨를 쓰듯 자유롭게 손을 움직일 것이다. 선은 장인의 손을 거쳐 스커트 레이스의 구부러진 선, 액자 부조의 서로 이어지는 선, 또는 케이크 위 생크림의 노즐 자국 선이 된다. 선이 얇을수록 섬세한 장식이 되며, 고도의 기술력으로 이루어진 선은 사람의 마음을 자극한다. 장식은 선적이며 연약한 것에서 시작된다.
드로잉과 페인팅의 중간 지점에 있을 법한 합성물을 만든다. 드로잉은 그린 자국을 통해 어떻게 손을 움직였는지를 보여준다. 페인팅은 붓질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차이를 만들어낸다. 작업은 붓으로 자국을 남기고 연필로 하나의 색 면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드로잉을 위한 페인팅을 제작한다. 그 후 물감을 흑연으로 치환한다. 붓 자국의 방향은 연필 선의 방향이 된다. 한 번의 붓질은 변환 과정에서 유닛으로 인식된다. 이 유닛은 수많은 연필 선으로 치환된다. 수많은 선이 윤곽의 방향을 그려내며 붓자국의 면적을 채운다. 드로잉을 위한 페인팅을 제작하는 것은, 새로운 페인팅을 위한 드로잉을 제작하는 것이다.
2
장식은 크림과 같이 선적으로 보이다가, 모이고 쌓이면 덩어리가 된다. 덩어리가 되면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된다. 포착할 수 있는 것은 계란 껍질의 겉면과 같은 껍데기이고, 포착할 수 없는 것은 그 안의 공간이다. 즉 천으로 대표되는 겉면과 이로 둘러싸인 공간을 인식하고, 이를 주름을 통해 만져가며 지각하는 것이 목적이다.
겉면은 내부를 철저히 감추고 있지만, 이를 엿볼 수 있는 틈이 존재한다. 이 틈은 우연적 혹은 의도적으로 생성된다. 후자의 경우 조형미를 위해, 혹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옷의 경우 팔의 트임은 아름다운 곡선을 의도한 것이고, 목과 손목의 파임은 실용적인 것이다. 예술적 표현이 이 덩어리를 재현할 때, 틈은 더 이상 안팎을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막혀버린다.
3
천을 재현한 조각(sculpture)은 부식, 파손으로 파편, 조각(fragment)이 된다. 전통적 대리석 조각은 연약한 고대 그리스 복식을 덩어리로 만든다. 인체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렸던 옷 주름에는 중력이 우세하나 사람의 힘이 작용한다. 반면 덩어리가 된 조각은 중력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흘러 부식되고 파손된 조각의 파편은 두께를 드러내며 안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다시 틈이 생기는 과정에서 새로운 두께가 형성된다.
의상은 '부풀어 오른 드레이퍼리(drapery)'가 된다. 무대 위에서 춤 추는 여자 아이돌의 마른 몸에는 여러 겹의 옷감이 쌓여 얹혀져 있다. 중력에 거슬러서 옷감을 세우기 위해 촘촘한 바느질이 들어가고, 살결을 타고 들어간 바람 때문에 옷이 볼록해진다. 고전적 드레이퍼리는 중력에 따라 아래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주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부풀어 오른 드레이퍼리'는 인위적인 조작을 거쳐 위로 부풀어 오른 모양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후자만이 관찰 불가능한 옷감과 피부 사이의 공간을 암시한다.
천은 디지털 조각으로 구현된다. 3D 모델링으로 디자인되어 여러 동작을 취하는 가상 아이돌 캐릭터는 납작한 표면으로 내부 공간을 은닉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의 퍼포먼스를 감상할 수 없는 것은, 그 화려한 의상 속 공간감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의 오류는 어깨와 머리카락이 서로를 관통하는 등 어색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장식적이고 현란한 의상을 장착하고 있지만, 최소의 두께감으로 입체감을 갖춘 것임을 확인한다.
위 세가지 양식들은 틈을 통해 새로운 두께를 만들어 낸다. 이 의도되지 않은 생성은 조형물을 무작위로 커팅하고, 인물이 춤추는 영상이나 가상 인물이 움직이는 게임의 화면을 무작위로 캡처할 때 일어난다. 스크린 캡처 결과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장면으로 재탄생한다.
Creamy ornament (2022.7)
1
재현적 요소를 걷어낸 추상 예술이 등장한 모더니즘 미술 이래 장식 예술은 부차적이고 과시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미니멀한 생활을 지향하는 동시대인들은 깔끔한 집을 인테리어하고 활동하기 편한 복식을 입는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 회화 속의 풍성한 드레스와 화려한 장식은 그 시대만의 것이 되었다.
2
하지만 우리는 패션쇼, 콘서트, 결혼식 등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곳에서 비슷한 패션 양식을 볼 수 있다. 옷 주름은 본래 인체의 모양을 숨기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무대 위에서 춤추는 여자 아이돌을 상상해보자. 그들의 마른 몸에 여러 겹의 옷감을 덧붙인 의상 디자이너들은 격렬한 움직임에도 모양이 망가지지 않도록 고정한다.
3
일상적이지 않은 부피를 신체에 얹고 커다란 무대 위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하는 아이돌은 물리적으로,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사람들에게 커다란 석상으로 제작된 신들과 비슷하게 보인다. 전통적인 신앙은 과학을 업고 현대 개인주의적인 신앙으로 나타난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은 포스터를 방 벽에 붙이고,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은 피규어를 방에 전시해 놓는다. 중세인들이 휴대용 제단화를 가지고 다니며 기도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스마트폰 배경 화면은 각자의 소망의 대상을 비춰준다.
4
개인의 소망과 욕망을 극대화하는 것은 대상을 꾸며주는 장식이다. 장식은 선적이고 연약한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케이크 위의 크림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리는 것들은 ‘크리미(creamy)’하다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모양이 뭉개지는 크림처럼 나의 표면들도 어딘가 뭉개져 있는 평면의 두께감이 있다. 옷 주름도 마찬가지로, 신체가 움직이면 당연히 신체를 감싼 의상에 새로운 표면이 형성된다. 옷 주름을 표현할 때, 유화 회화는 가장 우아하거나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박제한 것이고 무대 의상은 바느질로 가장 페티쉬를 자극하는 클리셰를 드러내는 것이다.
5
그 의도를 가장 잘 달성한 순간의 옷 주름이 단단해질수록, 내부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신체의 위치와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관찰 가능한 옷감의 표면과 관찰 불가능한 피부의 표면 사이에는 분명 공기, 옷감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 공간의 형태와 재료, 속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도 한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보다 가상 세계에서 자주 관찰된다. 노래하고 춤추는 3D 모델링 된 아이돌의 표면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머리카락과 의상은 덩어리져서 피부를 뚫을 것 같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의 퍼포먼스를 감상할 수 없는 것은, 그 화려한 드레스 속 공간감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6
모델링의 오류로 어깨나 팔을 머리가 관통하는 등 물체끼리 어색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에 그 공간을 부분이나마 인식하게 된다. 유저의 스크린 캡처에 포착된 연출되지 않은 장면은 단단하게 보였던 물체를 연약하게 한다. 나는 그들이 장식적이고 현란한 의상을 입었지만, 최소의 부피감과 두께감으로 입체감을 갖춘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이상한 부피와 두께에 집중하고자 한다. 현실의 옷감도 평면에서 시작하여 부풀고 왜곡된 결과이다. 딱딱하고 각이 진 크림 같은 형상을 나는 캔버스와 종이 위에 옮기고자 한다. 그 결과는 마치 부조를 조각한 듯 잘린 면처럼 보인다.
부풀어 오른 드레이퍼리 (2021)
이 글에서는 내 작업의 소재를 발견하는 과정과 ‘부풀어 오른 드레이퍼리’ 작업의 개념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모든 예술 표현의 시작점은 관찰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미감을 자극하는 것에 꽂히고, 이를 표현해낸다. 2022년 현재 나의 미적 감각을 최대화하는 것은 드레이퍼리 drapery,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이다.
나는 콘서트장에서 춤을 추는 여자 아이돌들의 의상을 관찰하였다. 그들의 마른 몸에는 여러 겹의 옷감이 쌓여 있다. 백스테이지에서 환복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무대에 오를 주인공이 옷을 능동적으로 입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옷이라는 물질을 살결 위에 얹는 것으로 보인다. 그 물질은 중력을 거스른다. 무대 조명 아래서 빛나는 의상은 촘촘한 바느질로 형태가 빚어져 살결을 타고 바람이 들어가 볼록해진다.
이들의 의상에는 부풀어 오른 드레이퍼리가 있다. 드레이퍼리란 본디 옷을 입었을 때 생기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주름이나 주름을 잡아 늘어뜨린 휘장 등을 말한다. 그렇다면 드레이퍼리란 중력의 순리대로 아래로 떨어지는 특성을 가지는 것인데, ‘부풀어 오른다’는 것은 모순된 수식어일 것이다. 현대 패션은 키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복식을 차용하되, 인위적으로 천을 잡아떼어 아름다운 드레이퍼리의 모양을 내는 것이다.
부풀어 오르는 것은 신체를 도드라지게 장식하고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넘어 은닉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는 원래 형태를 인지 불가능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에서 옷감까지의 표면과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어깨와 팔 관절의 움직임에 따라 몸 실루엣에서 튀어나오는 형상들을 보면서, 나는 그 의도되지 않은 주름을 인식할 뿐이다.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인식을 거부하는, 잡히지 않는 그 공간이 부풀어 오르고 사그라드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옷감의 공간 은닉 작용은 가상 세계에서도 관찰된다. 그래픽 게임 속 캐릭터들은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머리카락 덩어리와 어깨 덩어리가 서로 부딪히면서 관통하거나 어색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그 순간에 그 사이의 공간을 인식하게 된다. 모델링 과정에서 모든 신체는 덩어리로 쪼개지고 머리카락도, 소매의 퍼프도, 치마 레이스도 다 같은 부풀어 오른 드레이퍼리를 나타낸다.
2D와 3D 세계에서 천은 공기로만 차 있는 공간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 단단해진 공간은 주름을 타고 하나의 덩어리로 취급되어 나의 화면 안에서 부유하고 있다. 수없이 끊어진 붓질과 수많은 연필 스트로크는 결코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드레이퍼리를 위해 존재한다. 살짝 투명한 아크릴 물감의 물성과 바스러질 것 같은 연필의 건식성은 가볍고 연약해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감도 그렇다. 나는 부드러운 것들이 축 늘어뜨려져지기 전에 포착하여 단단한 면을 그려내고자 한다.
자기 비평 (2021)
실기실에 들어서자마자 긴 공간에 그림들이 보인다. 맞은 편 하늘색 벽이 깊이감을 준다. 오후 1시쯤 방문했을 때는 우측 창문에서 햇빛이 들어와 벽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메인이 되는 그림과 그림이 걸린 벽이 하얀색 틀 안에 푸른 색조의 액자 구조를 반복하며 조응하고 있다. 그림 속 흘러내리는 자국들이 페인트가 흘려진 자국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좌측 전시대 위에 스테이트먼트를 보기 위해 다가가면 2절 크기의 섬세한 색연필 드로잉이 보인다. 사각형의 틀 안에 장식적인 곡선의 무언가가 밀도 높게 그려져 있다. 작가는 바스러질 것 같은 색연필이라는 가벼운 재료의 물성을 통해 축 늘어뜨려지기 전의 드레이퍼리를 그려낸다. 스테이트먼트에서 '부풀어 오른 드레이퍼리'라는 언어적 표현이 모순임을 밝혀내면서 이를 추구한 결과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메인이 되는 <흐름>이야말로 공기중에서 하늘거리며 율동감 있는 큰 붓터치 속에 자잘한 세부 묘사가 밀도를 더해 시원한 느낌을 낸다. 하늘색과 붉은색, 그 사이에 섞인 금색 세 가지 색채가 자유롭게 넘실거린다.
평면에서 펼쳐지는 드레이퍼리의 향연은 인체를 감싸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작가는 '신체에서 옷감까지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고 말하며 몸 실루엣을 나타내는 <드레스> 연작을 선보인다. 색채에 맞는 세 가지 맛의 제목이 눈길을 끈다.
바닥에 놓인 종이 페인팅은 그 위의 캔버스로, 위에 놓여진 크림 형태의 오브제로, 그리고 각목으로 확장되어 전시장 전체로 연결된다. 우측에 흐트러진 각목 더미도 컬러의 디테일과 색연필 드로잉이 어지럽지 않은 선에서 작가의 주제를 나타낸다. 마치 잘 정돈된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열린 작가의 작업실을 살짝 엿보는 느낌이다.
파란색에서부터 시작 (2020)
나는 파란색에 집중한다. 파란색은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에서 성모 마리아의 색깔이었고,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파란 빛깔은 종교적 고양심을 높인다. 존귀한 것에는 파란색과 함께 금이 칠해졌고, 색의 지위는 그대로 미술품을 미술품으로 만들어주는 테두리 액자에게로 넘어왔다.
우리가 봐왔던 그림에서 형상을 빼고 색깔만 남긴다면 어떤 관점이 떠오를까? 나는 파란색과 금색 도상의 레퍼런스로부터 한정된 요소를 변형하여 작업한다.
<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공간에 대한 고찰>
화이트큐브는 벽 한가운데 걸린 단 하나의 작품,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원심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전시 공간에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있다. 나는 루브르의 몇 백년 전 유화를 둘러싼 액자들을 공간으로 확장하여 3차원의 모서리를 가시화했다.
<고전 회화의 옷주름에 대한 고찰>
무겁게 떨어지는 옷을 묘사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이상적인 인물상을 감싸는 자연스러운 형태의 옷주름을 전면에 내세워 부드러운 고전의 느낌으로 현대의 요소를 그려내고 있다.
<공사현장의 파란 천과 건축에 대한 고찰>
수십 미터의 높이를 이루는 직사각형의 구조물은 규칙적인 모듈을 구성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드레이퍼리 대신 모든 주름들은 비슷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인위적인 건축 요소를 둘러싼 천에서 색깔과 주름을 남기는 작업을 했다.
화이트 큐브, 블랙 박스, 블루 엣지 (2019)
미술관과 박물관 전시에서 틀은 허구 그 자체이다. 액자와 유리 진열장들은 칸 만화에서 칸을 나눌 때 그어진 선과 여백과 다름없다. 화이트 큐브는 벽 한가운데 걸린 하나의 작품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원심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관람객은 작품 자체만 보지 않고 액자, 조명, 벽지 등 물리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또한 캡션과 팜플렛의 설명, 오디오 가이드까지 텍스트가 감상자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나는 전시 공간에서 예술 작품 외에 공간이 인식된다는 것을 느꼈다. 뮤지엄은 바깥과 차단된 채로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종교적 체험을 하게 하는 성당 건축에서 그 목적만 변화한 공간 같다. 성당은 개별 작품들이 하나의 종교적 고양심을 위해 기능하는 원심적 예술의 구심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뮤지엄의 전시 형태를 고찰하면서, 그 역사 속에 있는 종교 건축 등과의 비교를 통해 예술이 인간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정리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액자를 소재로 삼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회화를 둘러싼 액자를 공간으로 확장하여 3차원의 모서리를 주어진 공간에 만들었다. 나는 서양의 성모 마리아 도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파란색과 금색의 조화와 조형적인 장식을 기호로 읽는다. 파란색이라는 상징성은 미술의 내용이 되고, 금색의 액자는 형식이 되었다. 나는 이를 뒤집었지만 옷주름처럼 부드러운 고전 회화의 느낌을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