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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현_접힌 주름, 클리셰를 펼치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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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힌 주름, 클리셰를 펼치기

 

권정현

 

 

바로크는 끊임없이 주름을 만든다. (...) 바로크는 주름을 구부리고 또다시 구부리며, 이것을 무한히 밀고 나아가, 주름 위에 주름을, 주름을 따라 주름을 만든다. 바로크의 특질은 무한히 나아가는 주름이다.[각주:1]

 

철학자 질 들뢰즈는 바로크 양식의 주름에서 외부와 내부를 통과하는, 무한히 분화하는 잠재성을 발견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세계의 궁극적인 실체로서 모나드(Monad)[각주:2]와 바로크 건축물의 공통된 특질은 주름이다. 잠재성이 응축되어 있는 모나드는 주름으로 가득 차 있고, 바로크의 특질 역시 무한히 나아가는 주름이라고 들뢰즈는 해석했다. 그는 주름에서 끝없이 접히고 펼쳐지며 분화하는 ‘무한성’을 보았고, 그 무한성에서 역동적인 생성력을 발견한다. 주름은 무한히 펼쳐지는 역동성과 생명성의 상징인 것이다.

  허가은은 바로 그 ‘주름’을 그린다. 고대 그리스의 기둥에서부터 르네상스의 액자, 고전 회화 속 인물의 드레스를 지나 오늘날 아이돌의 무대 의상과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복식까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주름을 수집하여 그린다. 그런데 허가은의 주름은 들뢰즈가 풀어내듯이 그리 심오하고 복잡한 의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허가은은 주름이라는 장식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린다고 말한다.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서 그는 섬세하고 복잡한 주름의 형태를 회화와 드로잉으로 표현한다.

 

현대의 주름과 시각적 클리셰

주름은 부풀어 올라 대상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과장하고 꾸미는 것, 즉 장식에 주름의 본질적 역할이 있다. 오늘날의 주름은 그런 것이다. 대상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 마음을 담은 선물을 정성들여 포장하는 것, 작은 몸체를 더 과장하여 장식하는 것이 주름이다. 여자 아이돌은 주름을 잡아 볼록하게 부풀면서도 안이 살짝 비치는 시스루의 퍼프 소매에 끝부분은 프릴 디테일로 여성스러움을 한층 강조한다. 촘촘히 드리워진 주름의 겹은 조명 아래 흔들림에 따라 반짝인다. 로맨스 판타지 웹툰에서는 여성 캐릭터는 물론이고 남성 캐릭터까지 화려한 주름이 있는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프릴이나 리본이 잔뜩 달린 로맨틱한 드레스를 입고 곱슬거리는 부드러운 금발 머릿결을 선보이고, 그 작화가 복잡하고 섬세할수록 독자는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주름은 그야말로 박제되어 이미지로나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돌의 무대 의상으로나 캐릭터의 복식으로 존재할 뿐, 현실의 패션에는 그러한 주름이 드물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스타일이 ‘모던하다’는 이름아래 미덕이 된 오늘날에, 일상생활에서 화려한 주름은 촌스러운 것에 가까워졌고, 보기 드문 것이 되었다. 일상에서 사라진 주름은 대중문화의 특정한 장르에서 그 장르를 향유하는 이들이 애호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페티시이자 클리셰다. 동시대의 주름은 정형화된 것, 딱딱한 것, 클리셰로 존재하며, 대중은 그렇게 정형화된 주름을 애호한다. 들뢰즈가 상찬하던 바로크의 주름이 접히고 펼쳐지면서 생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주름은 딱딱하게 고정되어 정형화된 것이다.

  아이돌을 소재로한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을 포괄하는 ‘아이돌물’은 무척 인기 있는 서브컬처의 한 장르다. 가상의 아이돌 캐릭터를 기반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발매될 뿐만 아니라 게임, 공연 등 다양한 매체의 콘텐츠가 생산된다. 당연하게도 이 가상 아이돌 또한 현실의 아이돌이 스테레오타입화한 ‘무대 의상’을 착용한다. 현실 아이돌보다 더 화려하고 강렬한 색의 가상 무대 의상과 실제로 구현하기 어려운 화려한 헤어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가상 아이돌 캐릭터의 드레스는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인다. 실제의 주름치마는 움직임에 따라 주름이 펴지고 다시 접히면서 흔들리지만, 가상의 주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덩어리로 좌우로 흔들린다. 캐릭터가 몸을 흔들고 회전을 해도, 주름의 형태는 언제나 기본 형태를 유지한다. 때로는 춤을 추는 캐릭터의 움직임이 풍성한 주름 드레스의 단면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매끈하게 렌더링된 3D 그래픽의 주름은 겹겹이 쌓여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주름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서 굳은 채로 움직이는 주름이다. 그 덩어리는 때로 의도치 않게 그것의 단면, 그러니까 꽉 찬 덩어리의 단면을 드러낸다.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는 주름, 그리고 꽉 차 있거나, 혹은 사실상 텅 빈 그 단면이 오늘날 주름의 본질에 가까울 것이다.

  시각적 클리셰는 “경직된 유형의 스테레오타입”[각주:3]으로서 실제와 얼마나 유사한가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그 자체의 관습 내에 얼마나 충실하여 즉각적으로 그 특징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주름치마가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의 문제다. 주름치마라고 상상하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 그것을 인식하는 데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실제 주름치마와 닮게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이미지로서 주름은 우리가 ‘주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가깝게 보이기 위해서 현실을 왜곡한다. 우리는 주름이란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것이며 켜켜이 쌓여 굴곡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의 주름이 때에 따라 중력에 의해 늘어지는 것과 달리 클리셰로서 주름은 언제나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모양을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상의 드레이퍼리가 중력에 따라 아래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주름을 지니는 반면, 현대의 무대 의상은 촘촘한 바느질로 옷감을 세워 부풀어 오른 주름을 만든다. 천을 겹겹이 접어 만든 세밀하고 풍성한 주름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박제화되어 애호의 대상으로 작용한다.

 

딱딱한 것의 새로운 가능성

박제된 아름다운 장식으로서 주름은 허가은의 작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펼쳐진다. 허가은은 주름을 때로는 회화로, 때로는 드로잉으로 옮기며 그 겹을 켜켜이 펼쳐낸다. 세밀한 겹이 겹쳐진 주름을 더 주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한다. 작업 초기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장식, 바로크의 액자 장식 같은 고전적인 형태의 주름을 그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현대적 의상의 주름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아갔으며, 주름을 표현하는 방식은 점차 그 특징을 뽑아내 추상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갔다.

  2021년에 진행한 ‘부풀어 오른 드레이퍼리’ 연작은 아이돌과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의상의 부분을 회화와 드로잉으로 옮긴 작업이다. 화려한 드레스의 한 부분은 허가은의 회화 위에서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나는 대신 형태를 잃고 부분적 특징만 남는다. <K의 드레스>(2021)는 주름의 곡선, 얇은 겹과 두터운 겹, 얼핏 드러나는 조임끈의 형태와 같은 몇 가지 요소만을 통해 그것이 드레스임을 알게 한다. 하나의 클리셰, 기호로서 주름은 몇 가지 특징만으로 전체를 상기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돌 K를 대신하거나 상징하는 것, 혹은 K 그 자체로서 K의 의상이다. 주름 장식은 곧 드레스가 되고, 그 드레스는 곧 K를 상징한다. 한편 <3명의 현실 무대>(2021)와 <3명의 가상 무대>(2021)는 더 적극적으로 의상이 인물을 상징함을 보여준다. 각각 실제 아이돌의 무대와 서브컬처 아이돌의 무대를 그린 두 작품에서 개별 인물의 신체는 드러나지 않지만 무대 의상만으로도 인물의 실루엣은 추정된다. 클리셰로서 무대 의상,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주름 조각이 그 자체로 아이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특징은 <Tokyo Girl>(2021), <Face Frame>(2021), <Blowing and Flowing>(2021)와 같이 대상의 부분을 가져와 그린 드로잉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제는 전체를 추정하는 것조차 어려운, 떨어져 나온 주름의 파편만이 남는다. 총체성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분열된 현대 사회를 그 자체로 대변하듯이 주름은 파편화되어 낱낱의 조각으로 등장한다. 구체적인 색 마저 잃은 채 푸른색으로 통일된 허가은의 주름 드로잉은 아주 세밀하게 그 세부를 표현할 뿐 전체는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파편들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은 전체를 상기하게 한다. 부분만으로도 전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역으로 전체가 부분으로 대변되는 것을 의미한다. 주름이 포함되었던 본래의 전체는 클리셰로서 주름으로 그 자신을 재현한다.

  2022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Creamy Ornaments’ 연작은 더욱 추상적인 형태를 향하게 된다. <The knee of sitting girl>(2022), <Sitting boy>(2022) 같은 작품은 제목으로 그 원형을 상상하게 할 뿐, 그려진 이미지에서는 구체적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소녀도 소년도 사라진 화면에는 주름만이 남는다. 굵고 가늘어지는 선, 어둡고 밝은 색으로 구성된 주름의 굴곡과 형태만 남아있을 뿐이다. 대상이 사라지고 남은 주름은 점점 더 추상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허가은의 그림에서 클리셰로서의 주름은 다시 추상으로 해체된다. 특정한 특징들을 강조하여 단순화하는 클리셰를 다시 추상화함으로써 펼쳐내는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클리셰는 다시 전형성 밖으로 펼쳐진다. 허가은은 최근에 종이를 콜라주하여 형태를 해체한 주름 이미지를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는 주름의 이미지를 더욱 추상화하는 방향을 향해 간다. 완전한 해체에 이른 주름은 클리셰의 속성을 낱낱이 펼쳐내 보여준다.

  무한히 펼쳐지는 것으로서 역동성을 상징하던 주름은 오늘날 하나의 애호 요소로서 클리셰가 되었다. 수만 가지의 취향을 몇 가지 요소로 카테고리화하여 정형화된 캐릭터를 양산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산업사회의 대중문화의 본질이다. 허가은은 그렇게 딱딱하게 박제된 주름을 회화와 드로잉으로 다시 옮김으로써 현대 대중문화의 클리셰의 속성을 들춰낸다. 특정한 특징들을 강조하는 클리셰의 속성을 들춰낸 뒤 그 속성들을 다시 추상화함으로써 해체한다.

 

 

<도판>

 

 

아이돌의 무대 의상은 촘촘한 프릴 장식으로 여성스러움을 더한다.

출처: [페이스캠4K] 아이유 '라일락' (IU 'LILAC' FaceCam)│@SBS Inkigayo_2021.03.28. https://youtu.be/BbUsVONNExo

 

 

 

춤을 추는 가상 아이돌 캐릭터의 치마의 주름은 하나의 덩어리로 위아래로 흔들릴 뿐, 흔들림에 따라 자연스러운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

출처: [아이돌마스터 스탈릿 시즌 / 4K UHD] KAWAIIウォーズ (코토하 센터) https://youtu.be/t3VGWSv00Lw

 

 

 

 

허가은 <3명의 현실 무대>(2021), <3명의 가상 무대>(2021)

 

 

 

허가은 <Sitting boy>(2022)

 
  1. 질 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이찬웅 역, 문학과지성사, 2008, 11쪽. [본문으로]
  2.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모나드는 모든 존재의 기본 실체로서 단순하고 불가분한 것이며, 원자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실체다. [본문으로]
  3. 핼 포스터, 첫 번째 팝 아트 시대, 조주연 역, 현실문화, 2020, 135쪽. [본문으로]